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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범연의 썸풋볼] 기성용, 이 남자의 성장법

SBS Sports
입력2014.09.30 14:57
수정2014.09.30 14:57

오랜 기간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것은 박지성이었다. 파파라치도 포기했다 소문날 만큼 바른 생활을 지켜온 순박한 표정의 청년이 거구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열심히 뛰어다니던 모습은 한국 선수들에 대한 이미지로 깊게 자리 잡았고 국내의 팬들 역시 어수룩한 말투의 인터뷰를 정겹게 바라보며 그에게 응원을 보냈었다.

이제 그의 뒤를 이은 선수는 어지간한 외국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는 장신과 도시의 잿빛 공기 속에서만 살아온 듯한 외모를 자랑한다. 활동량보다는 킥력과 발 재간으로 그라운드를 주름잡는 기성용이 그 주인공이다.


바른 생활 사나이 박지성과는 달리 당돌한 언변과 함께 온라인 상에서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그의 성격은 국내 팬들의 정서와 가끔 충돌이 벌어지기도 한다. 호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이기에 혹자는 실력과 함께 성격까지도 당시에 만들어졌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그의 호주 생활은 어땠을까? 그 답을 위해 호주에서 기성용을 지도했던 TY아카데미의 손재종 코치에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 기억의 시작

손재종 코치의 기억은 10년도 훌쩍 넘은 옛날로 돌아간다.

손재중 코치(이하 손):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제가 고등학교 신입생 때입니다. 성용이는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였을 거에요.”

손코치와 기성용 선수의 인연은 부친 기영옥 감독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침 손코치의 고등학교 감독을 맡고 있던 기영옥 감독의 아들 기성용은 철도 없고 장난기도 심한 아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손: “그야말로 절대 권력자의 장난꾸러기 아들이었죠. 고3 형들에게까지 서슴없이 장난을 걸던 아이였으니까요. 매사 자신감이 넘치고 당차서 역시 감독님의 아들이다 싶더군요. 근데 이렇게 호주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철없던 시절만을 기억하던 손코치에게 기성용은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호주에서 다시 만난 기성용은 어느새 훌쩍 커 있었고,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손: “하지만 장난기만큼은 여전하더군요.”

그 놈의 장난기는 어디 가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을 잊지 않는 손코치였다.


2. 재회, 또 다른 기성용

손코치는 기영옥 감독의 권유로 당시 호주 존 폴 칼리지의 축구 아카데미에서 코치로 일하기 시작했고, 기성용 역시 부친의 제안으로 해당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둘은 재회했다. 그 후 아카데미는 신태용 국가대표 코치가 인수하여 TY Sports Academy로 지금까지 존 폴 칼리지와 협력하게 되며 둘의 인연은 지속되었다.
손코치는 기성용 선수와의 인연이 담긴 이야기 보따리를 계속해 풀어놓았다.

손: “저희 축구아카데미는 호주의 사립학교 존 폴 칼리지와 협력해 정규 수업을 모두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용이 역시 예외가 아니었죠. 현재는 존 폴 칼리지의 호주 학생들의 훈련까지 저희가 맡고 있는 만큼 선수들의 학업 관리는 엄격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성용 선수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이었어요.”

예전 여러 매체에서 다루어졌듯 부친 기영옥 감독이 아들을 호주로 보내기로 결정한 이유는 영어였다. 혹시 축구로 성공하지 않아도 영어 실력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 그러나 기성용에게 두 번째 길은 필요치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손: “특히 영어는 기영옥 감독님께서 제게도 따로 부탁하실 만큼 강조했는데, 유독 부친을 무서워하던 성용이가 거역할 수도 없었겠지만 스스로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특히 영어 일기를 필기체로 쓰려고 노력하더니 제가 부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필기체를 써내려 가더군요. 본래 저희 아카데미에서는 훈련이 끝나면 영어 과외를 시키기도 하지만 성용이는 따로 지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혼자서도 노력하던 아이였습니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영어를 빠르게 습득한 기성용 선수에 대해 손코치가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하는 순간 역시 집중력의 결과였다.

손: “15세였는지, 16세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네요. 경기 중 왼쪽 코너 쪽에서 파울이 발생했습니다. 프리킥을 직접 골대로 차기에는 쉽지 않은 각도라 강한 크로스를 주문한 제게 바로 차 넣겠다고 하더군요. ‘무리일 텐데’라고 생각하는 사이 자신 있게 찬 공은 정확히 반대편 골대 상단에 꽂혔습니다.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3. 지금까지는 즐겼다. 이젠 이기겠다.

쓰리백의 중앙은 정확한 킥이 요구되는 만큼 기성용의 소속팀 감독들은 그에게 포지션 이동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탁월한 모습을 보이며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재능을 발휘한 기성용의 모습에 대해 손코치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손: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드필더를 봤었죠. 호주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같은 연령대 선수들보다 킥 능력이나 배급, 관리가 훨씬 좋았죠. 그런데 킥 능력을 믿고 센터서클 안에서만 공을 차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황제축구를 한다고 놀리기도 했죠.”

기성용 선수에게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도록 요구한 것은 호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수석코치를 맡고 있었던 김동기 코치 (현 대한축구협회 대표팀 지원팀장)과 Jeff Hopkins (현 A리그 Brisbane Roar Youth Team 감독)은 그에게 센터백부터 측면 수비, 측면 미드필더까지 두루 뛰도록 지시했다. 좀더 다양한 경험의 습득과 함께 활동량을 늘려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손: “그래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어디에서든 자신감이 넘쳤고, 축구 그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었어요. 물론 훈련에서만이지만 가끔 장갑을 끼고 골키퍼를 보려고도 했던 기억도 나네요. 즐거운 모습이었습니다.”

당돌하다고 여겨지는 성격은 고스란히 집중력과 승부욕으로 연결되었다.

손: “어렸을 때부터 공을 갖고 놀기를 좋아했기에 볼 컨트롤과 킥 능력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짧은 패스보다 긴 패스나 전방 패스를 더 즐기기도 했죠. 하지만 달리기가 너무 느렸습니다. 어렸을 때는 너무 느려서 ‘똥차’라고 놀렸습니다. 성이 기 씨라 붙여 부르면 ‘기똥차’가 되지만 공을 잘 차서가 아니라 느려서 똥차였지요. 똥차라 놀리면 삐친 마음에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한 적도 있습니다.”

똥차라니. 지금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별명이다.
아직 성장기였던 기성용 선수였기에 언제든 성장을 할 수 있었지만, 본인은 이를 기다리지 않았다. 지겨울 정도로 빨라질 수 있는 방법을 캐묻자 높은 언덕에서 내리막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면 빨라질 수 있다고 답한 손코치에게 새벽에 그 언덕만 수십 번을 뛰는 모습도 보였다.

손: “고등학생이 되고 근골격이 발달하면 속도는 좋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용이는 중학생 때부터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죠.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선수에요.”


손코치는 기성용의 승부욕이 본격적으로 발동된 것은 그가 연령별 대표팀에 합류하면서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손: “중학교 시절에는 워낙 개인 기량이 뛰어나니 즐기는 모습에 그쳤죠. 하지만 U15, U16 그리고 U17 대표팀에 뽑히고 다른 대표팀 선수의 실력을 느끼고 난 뒤에는 개인 훈련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운동도 계속 했고 훈련이 끝난 밤에는 웨이트 트레이닝도 게을리하지 않았죠. 특히 양쪽 발을 쓰는 훈련은 어릴 때부터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된 웨이트 트레이닝의 결과에는 기성용 본인도 자랑스러웠는지 손코치는 웃음을 머금은 채 그의 취미를 이른바 셀카찍기로 지목했다.

손: “성용이는 숙소 한 편에 설치해준 노래방 기계에서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를 정도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웨이트장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몸을 감상하는 것이 즐거웠나 봐요. 16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몸을 불리기 시작했는데,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자 상의를 벗고 셀카에 빠져들더군요. 물론 진정한 관심사는 몸 만들기라 해야겠지만 말이죠.”


4. 한국으로, 그리고 영국으로.

현재 대표팀에서 발을 맞추는 김주영 선수 역시 같은 축구아카데미 출신이다. 그 외에도 존 폴 칼리지와 축구아카데미 출신의 선수들이 현재 K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던 기성용 선수를 향한 열띤 스카우트 경쟁의 뒷얘기를 꺼내 놓았다.

손: “저흰 현재는 영국의 웨스트햄과도 협약을 맺는 등 매년 선수들을 영국 투어에 보내고 있습니다. 성용이 역시 예외는 아니죠. 그 투어에서 성용이에게 쏟아진 러브콜은 대단했었습니다. 수많은 프리미어 리그 유스팀에서 계약 제안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영국과 호주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비자 발급 등 여러 여건이 따라주지 않던 상황에서 한국에서 첫 발자국을 내딛기로 한 기성용 선수였다.

손: “한국에 복귀해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쉽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잘 해낼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기대를 져버리지 않더군요.”


건방질 정도로 당돌한 꼬마에서 황제축구를 하는 똥차를 거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가 되기까지 기성용 선수를 이끌어온 원동력은 집중력과 승부욕이었다. 그의 당돌함이 타인을 당황시킬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당돌함이 집중력과 승부욕을 벽돌 삼아 실력의 탑을 쌓을 수 있는 접착제가 되어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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