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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의 풋볼프리즘] 창사의 비극, 돌이킬 수 없는

SBS Sports 이은혜
입력2017.03.24 10:41
수정2018.01.16 11:25

"중국한테도 패하면 월드컵 본선 갈 자격 없는 것 아닌가"

지난 23일 중국전을 앞두고 여느 때처럼 수 많은 프리뷰 기사들이 쏟아졌다. 서두에 소개한 문장은 매체와 종류를 막론하고, 중국전 프리뷰 기사들을 클릭할 때마다 가장 빈번히 눈에 띄었던 '댓글'중 하나였다.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맥락상 비슷한 내용의 의견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 축구가 언제부터 이토록 중국 축구를 두려워 했냐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는, 일종의 자문자답 혹은 우문현답이었다. 그리고 중국전을 마친 직후 국가대표팀 주장 기성용은 이렇게 말했다. "선수와 코치진, 모두가 변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월드컵에 나갈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답을 알고 있듯 사실 역사는 '어쩌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수 많은 하루가 쌓여 오늘이 된다. 다만 게임의 헤게모니가 바뀌는 것이 한 순간일 뿐이다. 그리고 2017년 3월 23일은 한국과 중국 축구사 모두에 기록될 만한 하루가 됐다. 충격적인 90분 간, 헤게모니는 역전됐다.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우리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23일 중국 창사의 허롱스타디움에서 치러진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6차전 경기에서 0-1로 패했다. 감독부터 선수들까지 대표팀 스스로가 "내용은 의미 없다, 오로지 결과만 중요한 경기"라 정의했던 중국전은 이제 그 결과가 그대로 고스란히 한국 축구를 옥죄게 됐다. 패자이니 할 말도 없지만 내용은 더 부끄러웠다.

이전까지 치른 총 32번의 A매치에서 한국은 중국에게 18승 12무 1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국 축구가 중국에 당한 유일한 패배는 7년 전이었다. 지난 2010년 2월 일본에서 개최된 동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허정무 감독이 이끌고 있던 대표팀이 0-3으로 중국에 완패했다. 하지만 첫번째 패배는 나름대로 쓴 약이 됐다. 우리나라는 그 쇼크를 발판삼아 같은 해 남아공에서 치러진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나라 밖 월드컵에서 사상 처음으로 거둔 쾌거였다.
조직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는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라고들 한다. 축구도 그런 종목이다. 허정무 감독은 지금 첫번째 중국전 패배 감독이 아니라 원정 월드컵 16강을 이끈 지도자로 더 자주 인용된다. 선수의 인성 논란도 '실력'으로 잠재울 수 있는 것이 프로 스포츠의 세계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한테도 패하면 월드컵 본선에 갈 자격이 없다'는 일갈에는 중국 그 자체가 아니라 중국 축구의 수준을 폄훼하는 전제가 깔려있다. 국가대표팀은 그렇게 '결과론'의 극단에 있는 존재다. 아무리 훌륭한 인품을 가진 덕장이라도 실패의 낙인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실패한 지도자다. 아니, 적어도 성공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지도자였다. 한국 대표팀에 부임하기 이전까지 그가 대표팀, 아니 프로팀에서도 거둔 성과는 사실상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협회는 이 낯선 외국인 지도자에게 한국 축구의 재건을 일임했다. 브라질 월드컵 이후 떨어질 대로 떨어진 한국 축구의 신뢰 회복은 어느샌가 슈틸리케 한 사람의 몫이 됐다.

결과가 좋을 때는 모두가 그 상황에 무임승차 할 수 있다. 선수들, 축구협회, 좁게는 대표팀을 지원하는 기술위, 언론도 마찬가지다. '축구'라는 분야에 종사하는 모든 관계자들이 행복해진다. 하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그 책임을 지는 것도 슈틸리케 한 사람이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이상한 상황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런 상황을 만든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하고 거기서부터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한국 축구계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물론 슈틸리케 감독 본인에게도 '면죄부'가 주어질 가능성은 적다. 슈틸리케 감독은 경질 위기에 몰려 있던 지난해 10월 "나는 내일이라도 이 자리를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한국 대표팀이 지난 10여 년 동안 10명의 감독을 바꾸며 무엇을 얻었나"고 말한 적이 있다. 성급한 경질과 다급한 언론을 향해 그는 비수라도 꽂듯 반문했다. 그렇다면 되묻고 싶다. 성공한 경험이 없는 지도자가 한국 대표팀에 와서 역대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우면서 이 곳에 무엇을 남겼는지.
지난 2014년 9월 24일에 한국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취임한 슈틸리케 감독은 어제 치른 중국전 하루 뒤인 3월 24일 바로 오늘, 역대 대표팀 감독 중 최장 기간 재임하는 기록을 세웠다. 재임 기간은 2년 7개월, 날짜로는 912일이다. 최근 20년 동안 슈틸리케 감독보다 오랫동안 한국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수장은 없다. 그런데 그 장본인이 지금 한국 축구에 남기려고 하는 업적은 30년 만의 월드컵 본선 탈락이다.

2015년 아시안컵에서의 투혼으로 조용히 민낯을 감췄던 한국 축구의 현주소는 '창사의 비극'으로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연간 수백억원의 예산을 쓰는 축구협회가 검증되지 않은 외국인 지도자로 무마해 온 여론은 더 이상 기댈 수 있는 결과가 없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중국에 패한 것은 하루 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고비용 저효율의 조직을 방만하게 운영하는 축구협회, 제 역할을 해 본 적 없는 기술위, 선수단을 장악하지 못하는 전술 없는 감독, 수석 코치도 없는 대표팀 벤치, 더 이상 투혼이라는 허울의 강요를 원치 않는 선수들 그리고 그 상황에 무임승차한 진짜 책임자들. 철저히 변화를 요구하지 못한 언론 또한 이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창사의 비극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다. 슈틸리케 감독의 말처럼 남은 시간 동안 문제점을 잘 보완하고 4전 전승에 가까운 경기력으로 러시아 월드컵 본선 티켓을 가져오지 않는 한. '총체적 난국'이란 말은 이럴 때 사용하기 위해 있는 표현이 아닐까.

[사진 = 대한축구협회 제공]

(SBS스포츠 이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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