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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의 풋볼프리즘] 신태용 감독님, 적은 협회에 있습니다

SBS Sports 이은혜
입력2017.10.18 14:41
수정2018.01.16 11:30

'적은 혼노지에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 등에 가장 자주 사용되는 소재가 있습니다. '혼노지의 변'이라 불리는 일화입니다. 사실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 고대사에는 수 많은 미스터리가 존재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배신의 역사이기도 하고요. 물리적으로 명확히 파악하기 힘든 실제 동기는 차치하더라도 어찌됐든 후세의 사람들은 과거를 복기하고 곱씹으며 거기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결과에는 언제나 명백한 원인이 있고,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혼노지의 변'의 전말은 대략 이렇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던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천하통일을 완성할 마지막 격전지를 지원하기 위해 긴 출정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돌연 행선지를 바꿔 자신의 주군이 머물고 있던 혼노지라는 곳으로 향합니다. 천하통일 대업을 마무리할 목적으로 출정한 부대였던 만큼 미쓰히데의 병력 규모는 막대했습니다. 아무리 노부나가라 하더라도 비교적 작은 성에 속했던 혼노지에서, 그것도 사실상 방심 상태에 있던 소규모의 병력으로 미쓰히데 군의 공격에 저항하는 것은 역부족이었습니다.

패배를 직감한 노부나가는 결국 불타는 혼노지 안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자결했다는 설도 있고, 화재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혼노지의 변'은 오늘날까지도 일본 역사의 3대 미스터리에 꼽힐 정도로 기묘한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심복이 주군을 배신하는 미스터리한 배신극 자체가 드문 사건은 아니지만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갑작스러운 공격을 감행한 의도는 '설'만 무성할 뿐 여전히 미궁 속에 있습니다.

지난 9월 이후 지금까지 두 달 넘게 한국 축구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언론, 축구계 안과 밖의 수많은 내부자들과 외부자들이 일제히 의견과 대응책을 쏟아내며 난립하고 있지만 춘추전국시대에 버금가는 혼란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 혹은 감상이지만 한국 축구의 근간까지 흔들리고 있는 작금의 혼돈을 바라볼 때마다 바로 이 '혼노지의 변' 이야기가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혼돈의 극으로 치닫고 있던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혼노지의 변은 가장 결정적인 '원쿠션'으로 작용했습니다. 오나 노부나가라는 엄청난 인물조차 천하통일에 실패하면서 일본 전국시대는 한 차례 거대한 충격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후에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더욱 신중하게 권력을 수립하고, 운영하게 하는 계기가 됐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탄탄해 보이는 조직일지라도 그 조직이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데에는 반드시 내부 어딘가에 원인이 있습니다. 수많은 혼란과 희생이 동반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부로부터의 개혁은 결국 조직의 문제를 정확히 제거하고 해결하는데 있어 가장 강력하고도 결정적인 방아쇠가 됩니다. 어떤 역사에서는 그것이 '혁명'으로 구현되기도 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쿠데타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혼노지의 변처럼 배신이나 하극상이 벌어지기도 하고요.

물론 어떠한 사태의 형국에는 수많은 국면과 이해관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축구가 처한 위기 상황에는 누구도 의심치 않는 하나의 진실만은, 사태가 촉발된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며 존재해 왔습니다. 바로 적은 협회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능력함을 만천하에 입증하고 스스로의 신뢰를 스스로 바닥까지 떨어트린 협회에는 더 이상 지금의 위기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한국 축구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대표팀을 방패로 삼고 있는 축구협회의 행태는 천하를 얻으면 영욕을 향유하기 위한 이기적인 태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순수한 의도나 조직 나름대로의 노력과 변화를 향한 시도까지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한국 축구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은 축구협회 그 자신입니다. 고인 물은 썩게 되고, 썩은 물은 지금 협회를 통해 한국 축구 전체를 절벽의 마지노선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그 어떤 자리보다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위치에서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는 신태용 감독의 태도에 대해 그 태성적 '한계'까지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문제가 조기에 수습됐거나, 그 사이 여론의 주도권이 협회에 넘어갔거나 혹은 여론 자체가 선회했다면 신태용 감독이 지금 취하고 있는 수동적인 노선은 오히려 신중한 태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아줄의 마지막 지점까지 밀려 내려 온 지금, 이제 신태용 감독에게도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 상황이 최악 일로만을 반복하고 있어 오히려 문제가 발생한 시점 초기부터 신태용 감독이 직접 나서 선제대응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마저 커졌습니다. 히딩크 전 감독 문제에 대해, A매치 대진국 결정과정에서 보인 협회의 무능력에 대해, 코칭 스태프 보강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현실적으로 가장 명확한 개선을 요구를 할 수 있는 인물은 신태용 감독뿐입니다. 그것은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었을 때부터 주어진 잔혹한 권리이자 한국 축구의 정점을 책임져야 할 인물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대중이 분노하는 이유는 사실 너무나 명확합니다. 만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 여겨졌던 히딩크 전 감독의 '대표팀 명단 발표사건'이 가장 상징적인 에피소드일 겁니다. 원하는 선수를 선발하려는 히딩크 감독의 권한을 제어하고, 동시에 이해관계에 얽힌 선수선발 권한을 행사하려 했다는 에피소드는 지금 축구협회를 적폐 그 자체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사건의 진실과 이면이 무엇이든 이제는 '맥락'도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됐습니다. 일말의 사심 없이, 그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선수들을 발탁해 대표팀을 운영한 히딩크 전 감독의 성과를 이후 10년 넘게, 한국 축구계에서는 단 한 명의 지도자도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정하고, 정상적인 팀이 만들어 졌을 때 한국 축구가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모든 선수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기억해 왔습니다. 멀게는 차범근 같은, 박지성 같은, 가깝게는 손흥민 같은 선수는 무엇이 어찌됐든 한국 축구가 잉태한 자원들이고 재능들입니다.

성장 과정이나 환경은 다를지언정 한국 축구가 가지고 있는 잠재된 능력과 특유의 기질을 가장 공정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활용한다면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그 어떤 나라도 무섭지 않은 팀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대표팀으로 상징되는 한국 축구의 '투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은 그 중 몇몇을 통해 실력만으로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결과'로까지 이어져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나 큰 희망이 됐습니다.
비록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어도, 비록 남들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어도 자신의 신념과 실력을 믿고 노력하면 우리도 한국을 넘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축구라는 작은 프레임을 통해 경험해 왔습니다. 이것은 화려한 미사여구도 필요없고, 과장된 수식이나 추상적인 표현도 필요없는 지극히 명백한 사실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같은 팀에서 7년 이나 뛸 수 있는 아시아 선수는 아마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테니까요.

비정상적인 팀 운영, 납득할 수 없는 선수 기용, 이해할 수 없는 감독 발탁. 그런 것들은 축구를 모르는, 그저 대표팀 경기만 보는 사람들의 왜곡된 비판이 아닙니다. 진실을 통해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또 경험한 역사적 교훈들에 근거한 비난입니다. 한국 축구가 제대로만 하면 언젠가는 박지성 같은 선수가 또 나올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철저히 배신당했을 때의 절망감입니다.

어느 때보다 풍족한 성장 환경을 경험했던 한국 축구의 황금 세대들은 결국 가장 큰 위기를 자초하며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일찌감치 찾아 온 성공, 급속하게 커진 경제적 파이는 선수들에게 결과적으로 더 큰 동기부여가 아니라 독이 됐습니다. 그들이 이룬 성과와 업적은 자신들의 노력과 실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축구라는 스포츠를 꿈꾸는 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잔혹한 가정이지만 지금 신태용 감독을 도와 줄 지원군은 축구계 어디에도 없어 보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은 회피한 채 국가대표팀을 방패로 한국 축구를 갉아먹고 있는 협회를 의심해야 하고, 한 치 앞의 이익을 위해 눈가리고 아옹식의 충성을 맹세하는 선수들을 의심해야 하고, 그 누구보다 신태용 감독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해야 할 때 입니다. 지금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아니 사실상 마지막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 역시 신태용 감독뿐이기 때문입니다.

월드컵 성공이 아니라 평가전 1승도 힘들어진 지금, 불합리한 모든 것을 공개하고 뼛속까지 변화를 요구하십시오. 2002년은 우리에게 추억이 아니라 역사입니다. 신태용 감독님, 적은 협회에 있습니다.

[사진 = 대한축구협회 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SBS스포츠 이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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