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회 현장 21
현장 21
방송일 2012.11.13 (수)
ㆍ그들은 왜 제주도로 가는가?
ㆍ나는 선생님입니다
ㆍ‘디자인 서울’의 그늘
그들은 왜 제주도로 가는가?
지난해 12월 제주도로 이주한 결혼 2년차 박윤진(31) 여지현(28) 부부! 일본 유명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맞벌이를 하던 박윤진 부부는 현재 제주도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서울에 있는 대기업 계열 무역회사에서 연봉 5천 만 원 넘게 받던 조남희 (33) 씨. 나는 없는 채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싫었다는 그녀는 조금 벌어도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제주도에 내려왔다고 한다. 제주도에 온 지 4개월째. 현재 그녀는 제주도 정착을 위해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제주도 한 작은 시골 마을 허허벌판, 그곳 한 컨테이너 박스에서 만난 윤나현(34)씨와 김도나(34)씨! 두 젊은 여성은 서울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며 한창 커리어를 쌓아가던 중 직장을 그만두고 각종 문화적 혜택도 포기하고 제주도로 내려와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
제주도 가족 여행 중 제주도 이주 결심을 했다는 이상근(38)씨. 제주도 생활 2년째인 그는 불량아빠에서 유치원 손잡고 가는 아빠로 바뀌었다. 비록 서울에서 벌던 수입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그만큼 덜 쓰니 크게 부족함을 못 느낀다는 이상근씨. 그는 현재 제주도에서 가족의 재발견 중이라고 한다.
이처럼 최근 2년 사이에 제주도의 한 작은 시골마을에는 마을 가구 수가 20가구가 늘었다. 그 중 90%는 30대 전후의 젊은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게다가 제주도는 2년 전부터 반전이 일어나며 전입자가 전출자보다 무려 7배나 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제주 이주는 붐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으며 30대로 훌쩍 내려앉은 것이 눈길을 끌고 있는데..
과연, 이들이 한창 일할 나이에 외딴 섬에 내려와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선생님입니다
김인탁 씨(28)는 올해 2월, 중등학교 체육교사로 발령받았다.
그의 교사발령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가, 왼쪽 팔꿈치 아래가 없는 3급 지체장애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 살에 사고로 왼팔을 잃었지만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하며 뛰어 놀았고 성격도 밝았다.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좌절을 겪은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찾아온 사춘기. 그 때 처음으로 잃어버린 왼팔의 존재와 자신의 처지를 아프게 실감했다. 활달했던 김 씨의 성격은 점점 조용하고 내성적으로 변했다.
그렇게 우울하게 청소년기를 마치고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던 김 씨는 꿈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공부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기쁨을 느끼게 해준 것은 봉사 활동하던 보육원에서 중2 남학생을 가르치게 된 일이었다. 내성적인 아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함께 축구와 배드민턴을 했다. 점점 마음을 열고 차츰 공부에 흥미를 보이는 아이를 보면서 김씨 역시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그 희열은 곧 김 씨의 꿈이 됐다. 그때부터 김 씨의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 시작됐다.
정부는 장애인 교사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의무채용 정원을 정해놓고 있지만 임용시험조차 지원하는 이가 극히 드물다. 올해 경기도에서는 장애인 초등교원 90명 모집에 겨우 4명 지원했을 뿐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3% 고용률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 6%인 장애인 구분모집 정원을 최대 10%까지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전문가들은 장애인 구분모집 정원만 늘려서는 결코 장애인 고용률을 높일 수 없다고 지적하는데...
중증 장애인으로서 첫 체육교사로 일하고 있는 김인탁 씨. 김 씨가 부임한 학교는 체육 분야 창의 인성학교로 지정돼 다른 학교들보다 체육수업도, 관련업무도 많은 곳.
과연 교사로서 김 씨의 첫 1년은 어떠했을까? 또 그를 교사로 맞이한 학생들은 어떠했을까?
그의 발령 뒤 첫 1년 동안의 이야기와, 교사를 꿈꾸는 장애 학생들을 만나 장애인 교원 임용 확대 방안에 대해 들어본다.
디자인 수도의 그늘
하루 유동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는 동대문. 늘 북적이는 인파로 잠들 새 없는 이 패션타운의 한 가운데 나타난 거대한 건물이 있다. 공사에 든 돈은 무려 5000억 원이며 우리 근대사의 중요한 장소인 동대문 운동장은 이 건물을 위해 자리를 내줬다. 게다가, 이 건물이 들어설 땅을 파다가 발견된 유적은 실로 엄청나다. 600년 전 한양 도성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이간수문부터 각종 유구까지. 그런데 오며 가며 이것을 보는 시민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2006년 착공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 건물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경륜장’이냐는 황당한 추측도 적지 않다.
디자인 서울을 천명한 오세훈 시장의 역점 사업이던 이 건물의 이름은 DDP,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다. 건물의 목적은 ‘디자인의 메카’라지만 구체적인 용도는 지금도 고민 중. 이렇게 비싼 건물이 왜 아직 정체성조차 없는 것이며 한양 역사 그 자체인 동대문 땅을 짓누르는 듯 한 이 부조화는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까. 대체 이 건물을 둘러싸고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인지 현장21이 취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