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회 뉴스추적
뉴스추적
방송일 2009.04.08 (목)
대학로 집단유골의 진실 미궁에 빠진 대학로 집단 유골의 실체 지난해 11월 28일, 대학로에서 무더기로 유골이 발견됐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집단으로 유골이 발견됐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주목했다. 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떤 이유로 언제 그곳에 묻히게 됐는지 관심이 모아졌고, 온갖 ‘설’이 제기됐다. 한국전쟁 당시 사살된 국군들의 유골이라는 설, 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이라는 설, 의대 병원에서 나온 해부학 실습용 시신의 유골이라는 등... 그러나 어느 설도 근거가 불충분해 속 시원히 설명해내지 못했고, 추측과 의문이 더해가는 가운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정밀감식에 들어갔다. 국과수 정밀분석 결과 발표, 그러나 남는 의문들 3개월간의 기간을 거쳐 지난주 발표된 국과수의 정밀분석 결과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우선 애초 14구로 알려졌던 유골은 DNA검사 결과 28구로 밝혀졌다. 남녀 비율은 비슷했고, 특히 아이의 유골이 10구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사이엔 어떤 혈연관계도 보이지 않았다. 살해된 국군들이나 집단으로 학살된 민간인 일가족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반면 유골에 특별한 외상이 없는 점, 두개골에 예리한 톱날의 흔적이 있다는 점, 그리고 발견된 장소가 의과대학 근처라는 점 때문에 해부학 실습용 유골이라는 설은 힘을 얻었다.“어린이는 해부학 실습용으로 쓰지 않는다”는 학교와 의학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국과수 발표 이후 대부분 언론을 포함해 해부용 실습용이라는 결론은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대학로 집단 유골은 “해부 실습용이 아닌 일제가 인종론적 연구를 위해 채집한 유골이었다” [뉴스추적] 제작진은 당시 유골이 발견된 근처에 서울대학교 의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과 경성의전의 해부학 교실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해부학 교실이라면 유골과 어떤 연관성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작진은 석 달여 간의 추적 끝에 대학로 집단 유골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유골들이 단순한 해부학 실습용이 아니라, ‘일제가 인종론적 연구를 위해 대규모로 채집한 한국인 유골’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경성의전과 경성제대에서 인종학적 연구가 활발했으며, 당시 수집한 연구용 한국인 유골 콜렉션의 일부라는 것이다. 국내의 해부학과 법의학, 법치의학, 인류학 등의 전문가는 물론 경성제대와 경성의전 출신들의 증언. 그리고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인종학적 연구가 일본의 식민지 정당화와 영구화를 위해 중요한 근거로 이용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점 초기에는 조선인의 열등함과 일본인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1930년대 이후에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이라는 선전에 맞춰 한국인과 일본인이 원래는 같은 민족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인종론이 악용됐다는 것이다. 이번주 SBS [뉴스추적]에서는 취재진이 단독 입수한 기록과 자료, 국내 전문가와 일본 현지 학자들의 분석과 증언을 통해 대학로 집단 유골의 진실과 드러나는 일본 제국주의 인종론의 실체와 영향을 파헤쳐 본다. 제작 : 보도제작국 보도제작2부 기획 : 이승주 / 취재기자 : 유영수, 정영태 연락처 : 02) 2113-4223, 4422 / Fax : 02) 2113-4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