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회 SBS 스페셜
SBS 스페셜
방송일 2006.07.02 (월)
▶ 기획의도 고구려 말기. 그 시대에 동북아의 역사를 뒤흔든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연개소문... 그를 빼놓고 그 시대를 논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시대에 우뚝선 역사의 중심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아니, 많지 않은 것을 떠나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들도 진실 그대로 전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연개소문 사후, 얼마안 있어 고구려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자체 기록은 소실되고 적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만 남아, 우리는 온전한 역사를 잃어버렸다. 스스로의 손으로 역사를 남기지 못하였고, 아무도 고구려 입장에 서서 역사를 전하지 못하였다는 것. 그것이 왜곡의 진상일 것이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아직도 진실의 역사 저편에 가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왕을 시해하고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끈 악인일 뿐이다. 자체의 기록들이 모두 소멸된 이후, 고구려가 한때 어떠한 역사를 영위하였으며, 그 구체적 영역은 어디에까지 미쳤는지, 그 고구려에 대한 많은 부분이 여전히 잊혀진 채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연개소문, 그리고 그가 이끈 당대의 고구려! 그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사료의 미로 속을 헤집고, 왜곡된 기록의 한 꺼풀을 벗기는 작업에 도전한다. 연개소문, 그는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 시대의 고구려는 과연 어떤 나라였으며, 고구려 정신은 과연 어떤 것이었나... ▶ 구성내용 - 제1장.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 후세의 사람들은 고구려 멸망의 책임을 연개소문에게 묻는다. 그가 고구려 멸망의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선 연개소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이것이 선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감히 어떠한 판단도 함부로 내리기 어렵다. 그는 어쩌면 신채호 선생이 말했듯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영웅이었으며 내외의 음모에 의해 파란만장한 삶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고구려도 그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영웅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석연찮은 연개소문의 죽음, 우리는 그가 죽은 시기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남아있는 기록들의 대부분이 당시 적의 입장에서 기술된 중국 측 문헌들이기 때문이다. 그 기록들은 진실을 왜곡하고 누락시켰으며 승패를 바꾸었다. 그래서 그를 희대의 역적으로 탈바꿈시켰다. 자연히 그가 살았던 시대, 고구려에 대한 많은 것도 왜곡되었다. - 제2장. 7세기 문명사 대전 : 제1차 고당전쟁 때는 서기 644년. 새로이 중원의 패자로 등장한 당 태종 이세민은 마지막 남은 이민족 세력, 그러나 결코 당나라에게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고구려에 도전하는 첫발을 내디뎠다. 뼈와 살이 맞부딪히고 병사의 고통과 눈물은 다시 전장의 함성 속에 파묻혀 버리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함 5백 척, 무수한 공성전용 무기, 육군과 수군 50만 명 (추정)이라는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여 출동한 당군. 그러나 당시 고구려에는 이미 당대에 알려진 최고의 전략가 연개소문이 버티고 있었다. - 제3장. 승리로 이끈 신성대전 당나라의 첫 전과는 개모성 함락이었다.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당군은 개모성 인근인 신성 부근에서 고구려군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밤낮으로 전투가 계속 이어지니 이를 우리는 신성대전이라 칭한다. 중국 측의 사료에서는 이 신성대전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열전에서만 일부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정도이다. 우리는 이 전투의 결과를 고구려의 대승으로 추정한다. 사료에서는 이 당시 당태종이 요수를 건넌 뒤 다리를 철거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다잡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바로 전세에 불리해진 당 태종의 배수진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 제4장. 연개소문의 등장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당의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진행되던 641년. 고구려의 영류왕은 이미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야욕을 어느 정도 간파하여 16년에 걸쳐 천리장성 축조를 명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대당 유화정책을 계속 견지해나가고 있었으며, 이러한 대당정책에 연개소문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영류왕은 동부대인 연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한다. 실질적인 권력자 연개소문에 대한 견제가 암묵적인 것을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그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로까지 발전한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 이에 대해 연개소문은 역작전에 돌입하였으니 직후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손으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 제5장. 이세민은 왜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나 - 문명의 질투 연개소문의 쿠데타 소식을 들은 이세민은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칠 구실을 잡는다.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행동을 하였다하여 고구려를 거꾸러뜨리겠다는 칙서를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는 진위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고구려가 마지막 남은 이민족세력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호승심에 눈이 먼 당 태종은 여러 신하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의 총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친정을 준비한다. 피로 물들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제6장. 요동성 전투의 수수께끼 사료에서는 당군이 12일만에 고구려 요동성을 함락하였다고 전한다. 12일만에 요동성이 함락되는 동안 과연 고구려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 때 연개소문은 백암성 병력 만 여 명, 개모성 병력 7백명, 안시성 15만 대군, 그 밖에도 신성 남쪽 전투에 대군을 파견하였지만 요동성에만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혹 연개소문은 전략적으로 요동성을 포기함으로써 요동성 함락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다음의 당군 행로에서 결정적 타격을 가할 준비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당군은 12일 만에 요동성 함락이라는 예기치 못한 쉬운 승리를 거두 었지만, 승전결과가 애초에 기대했던 대승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고, 오히려 이것은 후에 당 태종 이세민의 다음 행보를 어렵게 만들었다. - 제7장. 혈전장 - 주필산 전투의 미스터리 연개소문이 요동성까지 전략적으로 포기하면서 마련해놓은 회심의 역작은 바로 안시성이었다. 고구려군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이미 대군을 포진하고 당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상태. 바야흐로 여기서 건곤일척의 승부가 벌어졌으니, 이를 후대는 주필산 전투라 부른다. 허나 이 전투가 과연 중국측 사료들이 전하는 그대로 당군이 승리한 전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료에서는 주필산 전투가 한 번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짐작된다. 즉 1차 주필산 전투에서는 당군이 승리하여 3만 고구려군이 포로가 되었지만, 2차 전투에서는 고구려가 대승을 거두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 제8장. 안시성 전투 때는 여름, 요수와마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폭우로 인해 요수가 불어나 그 주변 늪지대인 요택의 환경이 악화되어, 당의 행군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반면, 주필산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고구려군은 이미 안시성 안으로 집결해 있었는데... 결국 고구려군의 군량미 차단 작전에 의해 식량마저 떨어진 당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달 여간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산을 쌓으며 수시로 안시성을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당군은 안시성 성벽 높이보다 높게 토산을 쌓았지만, 장마 후 약해진 지반으로 인해 토산은 무너지고 당군은 또 한 차례 시련을 맞는다. - 제9장. 군량미 수송로를 끊다. - 건안대전 ‘군량미 수송로를 끊어라!’ 연개소문 대당전략의 큰 구도는 지구전을 펼치면서 당군의 식량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군량미 수송을 맡았던 장량의 수군이 건안성 인근을 지나다 고구려 대군의 기습을 받게 되는데, 이를 건안대전으로 추정한다. - 제10장. 돌아가고자 하나 길은 없고 당군이 전력을 기울여 쌓고 있던 토산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이 그 틈을 비집고 고구려군이 출전하여 토산을 점령한다. 한편의 그림같은 작전이 안시성에서 전개된 것이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부복애를 참수하고 제 장수들을 호령하여 3일간 총공격을 가하였지만 토산위에 진영을 구축한 고구려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끝내 토산을 재탈환하지 못하게 된다. 전쟁에 참패한 당군의 최선은 오직 하나, 후퇴뿐이었지만 그것마저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으니, 우리는 여기서 연개소문의 뛰어난 전략을 만나볼 수 있다. 요택에서 후퇴하는 당군의 배후를 치는 것이었다. 이 때 당군이 큰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다. - 제11장. 고구려 포로들의 수수께끼 중국 측 사료에서는 당 태종이 당나라 조정의 비용을 들여 포로들을 양민으로 환속시켜 주는가 하면, 포로들에게 여행용 식량까지 주면서 거의 전부 고구려로 보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1차 주필산 전투에서 잡았던 3만 명의 포로까지 포함되어 있다. 정상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왜 당 태종은 포로들에게 선처를 베풀었는가? 이제 여기서부터는 기존 사료들로는 더 이상 추론이 불가능한, 무언가 대단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제12장. 정사와 야사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당태종 이세민의 패배와 연개소문에 대한 두려움을 전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까지도 고구려 인물에 대해서 중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인데... 연개소문, 과연 그는 누구인가.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수많은 세월을 격하고도 ‘두려운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인가. - 제13장. 이어지는 전투 ‘고구려 전역을 파하라.’ 당 태종 이세민의 유조이다. 태종이 죽은 뒤,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는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지만 전쟁이 결코 멈춘 것은 아니었다. 653년 토호진수 전투 이후로도 고구려를 치기 위한 당군과의 접전이 몇 차례 있었지만, 당은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에 단 한번도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했다. - 제14장. 보이지 않는 손 정세가 당 측에는 유리하지 않게, 반면에 고구려에 결코 불리하지 않게 돌아가는 가운데, 당 측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략가’가 등장한다. 허나 그의 실체는 기록에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전략가가 있었음을 상정한다. 그로 인해 일진 일퇴의 공방전으로 국지전에 머물던 정세가 일거에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의 돌연한 멸망으로부터 연개소문이 사망하는 665년, 그리고 그 이후까지의 정세변동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그 존재 유무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