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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회 SBS 스페셜

SBS 스페셜

방송일 2009.03.01 (월)
[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
방송예정일시 : 2009년 3월 1일 (일) 밤 11시 10분 (60분간)

■ 기획의도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 일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일제는 고위 지도층을 회유하기 위해 거액의 은사금과 귀족 작위를 제시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준 은사금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거액. 대부분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협력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 명문가가 있었다. 우당 이회영 일가. 그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 이래 영의정만 9명을 배출한 삼한갑족으로 부친은 이조판서, 당숙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동생 이시영은 평안남도 관찰사와 한성재판소장을 지낸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들은 한일합방이 되자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전 가족이 망명의 길을 떠났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해외에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정예의 독립군을 배양하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이회영의 아내가 기록한 한 가문의 처절한 독립운동사
이회영 일가가 도착한 곳은 중국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 그들은 조선에서 가져간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척박한 만주 땅을 개간하고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의열단거사, 조선의용대, 대한광복군 등 일제 36년간 끊임없이 이어온 항일전쟁은 거의 모두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000여 명의 독립군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이자 독립의 설계자였던 우당 이회영은 좌우의 이념대립을 거치면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와 함께 망명의 길을 걸었던 아내 이은숙의 회고록이 아니었다면 그가 걸어온 독립운동의 발자취는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한지 200장에 빼곡히 써내려간 아내의 기록에는 100년 전 이 땅의 애국지사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국난의 위기에서 사회 지도층의 책임은 과연 무엇인지 우당 이회영 일가가 남긴 교훈을 통해 다시금 되돌아보고자 한다.   

■ 주요내용

헤이그 특사 사건, 그 배후는 따로 있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이회영과 동지들은 비밀결사조직 신민회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한다. 이회영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고종에게 제안하고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이상설을 대표로 보낸다. 일제의 감시를 뚫고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받아 세계 각국의 대표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일생일대의 거사. 그 배후에 이회영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독립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일제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조선은 일본에 병합된다. 나라의 주권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이회영과 형제들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떠난다. 서간도에 정착한 이회영 일가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3000여 명의 정예 교관들을 양성한다. 이들 졸업생들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국 전역을 누비며 독립전쟁을 수행한다.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마저 바쳤던 이회영. 서간도에서는 지금도 그를 독립운동의 수령이라 부른다. 

실패로 돌아간 비밀 거사, 고종 망명 계획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뒤 국내로 잠입한 이회영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 거사를 기획한다. 그것은 바로 고종 망명 계획이었다. 한일합방의 최종인가자인 고종 황제를 해외로 빼돌려 합방의 부당성과 강제성을 증명한다면 일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힘과 동시에 독립운동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칠 것이라는 의도였다. 이회영은 고종의 조카딸과 결혼한 아들의 신부례를 빌미삼아 궁궐을 드나들며 고종과 은밀히 내통한다. 고종의 외척 민영달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아 북경에 행궁까지 마련하지만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독립의 유일한 방안은 오직 무장투쟁뿐이다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한창일 때, 이회영은 임시의정원 자리를 박차고 북경으로 돌아온다. 권력의 유혹에 빠지기보다 독립운동의 힘을 규합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민중의 무력에 의한 투쟁만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고, 의열단을 후원하며 일본군 핵심 간부나 식민지 수탈기관 등을 겨냥한 직접투쟁을 독려했다.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과 함께 ‘북경의 삼걸’로 꼽힌 이회영. 그는 당시 수많은 애국 청년들의 모범이자 사표(師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