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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회 SBS 스페셜

SBS 스페셜

방송일 2009.06.21 (월)
[생존의 공습경보 - 공포]
방송날짜 : 2009년 6월 21일 밤 11시 20분

■ 기획의도

“지하가 넓어 무빙워크도 되어 있고, 안에 상점들로 빼곡한 지하철역이 있잖아요. 무빙워크를 쭉 타고 가다 보면 통로가 나올 텐데, 갑자기 지상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극한까지 들었을 때는 내가 여기 그대로 묻힐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거의 정신이 혼미해지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지하철을 못 타요.”

하얗게 밤이 새도록 잠을 잘 수가 없어 탈진한 상태에서 식은땀으로 내복이 다 젖어 샤워를 하는데, 눈을 감고 비누칠을 하는 순간 또 다시 찾아와 그대로 목욕탕을 뛰쳐나오게 만드는 그것, 비눗기도 가시지 않은 몸에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바깥으로 나오는 자신의 비참함과 마주하게 만드는 그것, 이러다가 내가 미치거나 죽지 싶은 그것, 바로 공포다.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서라도 한 발자국도 내 안에 들여보낼 수 없는 한 여름 밤의 무서운 이야기부터 높다랗고 어두컴컴하고 꽉 막힌 공간이 보내는 불안의 신호들, 맹수 앞에서 쭈뼛 서는 머리털과 타들 듯 오므라드는 장기,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화끈 달아오르는 불편함, 그리고 강아지가 달려들 때 순간적으로 피하게 되는 본능의 근거까지를 우리는 ‘공포’라고 부른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공포 자극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보다 여기에 과잉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위협적인 자극인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덤벼들었을 때보다는 조그마한 위험 신호에도 완전무장을 할 경우에 잠깐의 손해는 있을지언정 온전히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들보다 한층 더 진화된 징표로써의 공포증은 왜 우리들의 발목을 붙잡는가?

■ 주요내용

#1. 참을 수 없는 공포의 무거움

해마다 여름이 찾아오는 것이 두렵기만 한 주부 강현경씨. 벌레들의 은신처인 풀밭이 싫어서 대한민국이 온통 시멘트 바닥으로 뒤덮이길 바라는 그녀의 집에는 언제나 살충제, 전자 모기향, 전기 충격기 등 벌레를 쫓는 각종 장비들이 구비되어 있다. 

남들보다 예민한 성격도 아니다. 벌레에게 호되게 당해본 기억도 없다. 물론 현경씨도 알고 있다. 자신보다 몇 배나 작디 작은 벌레들이 자신을 결코 해치지 못할 것임을. 그러나 현경씨는 오늘도 자신의 벌레 공포증과 맞서 초여름의 길목에서 전기 충격기를 휘두르고 있다.

한편 귀신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직장인 가소영씨의 공포 대상은 바로 비둘기다. 그녀에게 도시의 비둘기는 더럽거나 혐오스러운 대상 이라기보다는 공포 그 자체다. 마치 번지점프를 하기 전의 무서운 느낌으로 비둘기는 소영씨에게 덤벼들고, 부리로 쪼고, 날갯짓으로 소영씨를 위협할 것만 같다. 

누구나 아찔한 절벽과 날선 칼 끝 앞에서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하고 자신을 지킨다. 그렇다면 현경씨와 소영씨를 추격하는 벌레와 새의 망령 또한 두 여인을 지켜주는 보호막인 것일까? 도대체 이 악몽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2. 바나나 괴물의 키스

할로윈 호박 귀신 얘기가 아니다.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한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 이야기 보듯 웃을 수도 없다. 바로 과일을 무서워하는 어느 평범한 고등학생의 사연이다. 

엄마가 “민지야, 공부해라!” 라고 할 때보다 “민지야 바나나 먹어라!”라고 말할 때가 더 무섭다는 여고생 이민지양. 한창 여드름 없는 뽀얀 피부에 관심이 많은 민지는 과일을 먹지 못한다. 먹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과일을 만져본 적도 없다. 심지어 민지가 가장 싫어하는 과일인 바나나를 볼 때면 민지는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원숭이가 먹는 걸 사람이 먹지?” 입에 닿자마자 뱉어버린 바나나의 첫인상은 축축한 걸레의 미각이었다.  

편식이나 알레르기 증상도 아닌 민지의 과일 공포. 선뜻 공포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과일에 대한 민지의 반응. 과연 정체가 무엇일까?   

#3. 천하장사의 천적

차라리 벌레, 새, 과일처럼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의 실체만이라도 알기를 간절히 바라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한 육체와 훈련으로 다져진 강인한 정신으로 경쟁자들에겐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의 이름은 천하장사 이만기.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를 타는 순간 제어할 수 없는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그 후 출장을 갈 때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에 응급실과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고, 비행기 대신 기차에 올랐건만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 중간 기착지에서 뛰어 내리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공포의 가면을 벗겨내기까지는 3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필요했다.      

갑자기 찾아온 공포, 공황장애로 인해 오히려 성숙해져 더불어 사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천하장사 이만기 교수. 그가 젊음을 바쳐 온몸으로 싸워 승리한 것이 씨름이었다면, 공황은 그의 남은 인생을 걸고 싸워 이겨내야 했던 천적이었다. 

#4. 공포와의 인터뷰

천하장사도 떨게 만드는 공포. 그런데 아직도 공포는 타인의 고통일 뿐이라고 넋 놓고 있을지 모를 당신에게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예측 불허의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과 신종 인플루엔자의 위협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공포일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특유의 변신술로 우리를 괴롭혀 온 공포. 과연 공포의 근원은 무엇일까? 태어날 때부터 우리 몸에 암호로 저장된 본능일까, 무의식적으로 받는 스트레스 탓일까, 아니면 기억의 유무와 상관 없이 과거의 어떤 경험과의 인과관계일까? 그렇다면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잊혀지는 사건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공포가 되고, 심지어 ‘공포증’으로 심화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공포는 인간이 갖고 있는 본연의 감정이다. 즉, 공포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문제는 공포 대상을 무조건 회피함으로써 다채로운 기회를 놓치고, 공포에 대한 민감한 반응으로 우리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마치 전쟁과도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가까워서도, 그렇다고 너무 멀어져서도 안 되는 미묘한 동반자 공포에 대해 알아본다.

연출: 강범석 / 작가: 최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