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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회 SBS 스페셜

SBS 스페셜

방송일 2009.11.08 (월)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_ 거기에 있는 이유가 있었다
방송날짜 : 2009년 11월 8일 밤 11시 20분
연출, 구성 : 서유정


■ 기획 의도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지난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조선왕릉, 그러나 우리는 500년 역사가 이토록 우리 곁에 가까이 숨 쉬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1,756만 9,000평방미터 면적의 조선시대판 그린벨트, 왕릉공원은 오로지 한국에만 있는 가장 한국적인 공원으로 인공과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 역사를 품고 있었다.

우리는 잠든 왕릉을 깨워, 왕릉에 숨겨진 풍수와 500년 권력의 역사를 만날 수 있었다.


■ 주요 내용

왕릉풍수와 권력의 역사 


풍수에 대한 절대적 믿음, 왕릉 풍수 


잠든 왕은 커다란 사초지 위에 있다.  
사초지는 커다란 생기(生氣) 저장탱크이다. 용맥이라는 능선을 타고 내려와 사초지에 저장된 생기는, 그 위 능침에 영면한 왕들에게 생기(生氣)를 준다. 
이 생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진다고 하였으니(氣乘風則散), 이 기운을 흩어지지 않게 안아주는 산이 있어야 하며, 다른 한편 생기는 또한 물을 만나면 머문다고 하여(界水則止), 왕릉 앞으로는 반드시 물이 흐르는 계곡수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귀중하게 모아진 생기는 숲을 넘고 넘어 살아있는 후손, 구중궁궐 깊은 곳의 동기감응, 즉 같은 유전자를 가진 혈육의 왕에게 전달이 된다. 그래서 왕과 왕의 자손들의 발복을 이루고, 축복이 된다. 이것이 조선조 왕릉 풍수였다. 

조선왕조는 유교 국가이면서 동시에 풍수를 신봉하는 국가였다.
저 왕릉은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했고, 왜 그렇게 조성되었을까?


거기에 그렇게 있는 이유가 있었다 

경국대전 기록에는 조선의 왕릉은 도성 4대문으로부터 8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입지조건이 명시되어있다. 그 이유는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왕은 가장 먼저 왕궁을 장악하여야 했기 때문에 능제를 지낸 왕들이 서둘러 출발할 경우 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왕궁과의 거리를 계산하여 80리가 정해졌던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거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가 또한 있었다.

가장 남쪽에 있는 왕릉은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와 정조이다. 그런데 수원은 당시 궁궐에서 88리에 해당되었기에 대신들이 반대했다. 그러자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수원을 80리라고 명하노라.” 그래서 그때부터 수원은 한양에서 80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역풍수(逆風水) : 풍수를 거슬러 뜻을 이루다

풍수는, 믿는 사람에게는 실현 가능한 미래였다. 그런데 이 풍수를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순리의 천명을 거슬러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었다. 당시 풍수 정서로는, 그러한 것이 가능했다고 여겼다. 

세종 23년, 그러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다. 

세종 23년(1441년) 7월 23일, 조선 왕실에는 경사가 있었다. 세종임금의 며느리인 왕세자빈 권씨가 손자 단종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기쁨도 잠시, 다음날 단종 출산 하루 만에 권씨가 숨을 거둔다. 
장례 절차가 진행되던 와중에, 전농시에 소속된 종 목효지는 감히 노비의 신분으로 상소문을 올린다. 
빈궁의 능소인 안산 고읍 땅은 ‘낳은 아이(兒)가 녹아버리며(生兒銷鑠). 사내를 죽이고 어른을 죽이고(犯之則殺男殺長), 장자·장손이 일찍 죽는(長子長孫須夭壽) 흉악한 땅’ 이라는 것.
또한 세종실록은 전한다. [임금이 말하길, “목효지의 말은 나도 역시 믿지 아니하나, 다만 그 땅이 바다에 가까워서 파도(波濤) 소리가 있을까 염려되고...”]
결국 풍수 초보자도 아는 ‘바닷가에 명당 없다’는 금기사항을 깬 특이한 장지 선정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1년 반 후인 1443년 1월 30일. 
조정에서는 아버지 태종 곁에 묻히고 싶어 한 세종이 신후지지로 미리 정해놓은 수릉(壽陵) 자리가 흉지라는 주장이 흘러나온다.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최양선, 그의 주장은 이렇다. “세종의 수릉(壽陵) 자리에 그대로 왕릉을 쓸 경우, (세종의) 자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는다 (絶嗣損長子:절사손장자)”, 무시무시한 예언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승하 후 예정대로 태종의 옆에 묻혔다. 

현재 세종임금의 능은 경기도 여주의 영능. 그러나 이곳은 후일 천장하여 옮겨간 곳이고 당시 세종의 초장지는 지금의 태종릉 즉 헌릉의 옆에 있는 인릉 자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에 이어 재위에 오른 조선 제5대왕 문종이 2년 3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끝으로 승하하였다. 앞서 문종의 왕비였던 현덕왕후 권씨의 능에 대해 논란을 벌였던 노비 목효지가 이번에 다시 문종왕릉이 나쁘다는 주장을 한다.
그 주장인즉슨, 헌릉의 내맥(來脈)이 좋지 않아, 주인은 약하고 객은 강하여, 정룡(正龍)·정혈(正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룡(正龍)·정혈(正穴)이 아니라면...? 방룡(傍龍) 자리! 말하자면 적자, 적손자로 이어지는 직계가 아닌 방룡(傍龍), 즉 방계(傍系)가 잘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번에도 목효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먼 변방, 안성참(安城站) 	아전
소속 노비로 쫓겨 간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문종릉 예정지 남혈에서 물이 솟아오르고 돌이 나왔다.

장지에 대한 지관들의 문제점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의 논지로 애초에 정해진 왕릉들을 그대로 강행하려 한 세력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언급된 지관들의 주장은 초장지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 한결같이 장자 즉, 맏아들에게는 불리한 자리였다는 점이다. 이 말은 반대로 유리한 쪽이 있었다는 말. 그들이 누구인가? 장자, 장손이 잘못되는 자리로, 방룡, 즉 방계가 잘되는 자리로 강행하려 한 세력들, 이정녕, 정인지를 비롯한 일단의 세력들 배후는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이후 조선 제7대 세조로 재위에 오르지만, 그는 당시 정상적으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던, 세종의 ‘둘째 아들’, 즉 방계, 여기서는 방룡(傍龍)이었던 것이다. 


역풍수에서 정풍수로

“그런데 이 역사라는 것이 희한하게도 그 말대로 됩니다. 세종 이후에 문종, 단종, 세조, 예종까지... 약 20년 동안에 거의 자손이 없습니다. 세조만 빼놓고.”
						    _ 김연호 문학박사 전통지리학자

세조가 계유정난을 통해 왕권을 틀어쥐면서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무렵 조선왕실 주변을 떠도는 소문들이 있었으니, 조선 왕실에서는 진작부터 ‘장남 왕통 불길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세조에게 첫 번째 타격은 장남이었던 왕세자 의경세자의 돌연한 죽음이었다. 의경세자의 이때 나이 스무 살. 이때가 세조 3년 (1457년) 9월 2일이었다.  
풍수가들이 말한 ‘절사손장자’라는 비극적 예언이 당대로 끝나지 않고 세조의 맏아들에게까지 그 여파를 미친 것인가? 
이에 세조는 죽은 의경세자의 묘자리 선정에 대단한 정성을 기울였다. 경릉, 지금도 관련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명당 중의 명당으로 실측 결과, 능침의 규모가 조선왕릉 40여기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제7대 세조의 왕릉, 광릉. 처음 광릉이 조성될 즈음, 이곳은 몇 만평의 광대한 영역을 자랑했다. 떨어진 낙엽 하나 함부로 주워갈 수 없는 금역이었다. 5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광릉 숲이 천혜의 자연공원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 광릉 조성에 힘입은 바가 컸다. 
세조릉의 풍수관련 변화들은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다. 광릉은 여타의 왕릉, 특히 개국시조 이성계의 건원릉보다 상윗자리에 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좌우 산들이 가깝게 있으면 빨리 영향을 받게 되겠고, 그 분명한 기운이 빨리 후손에 영향을 준다. 그렇게 해서 그런 속성발복이다 이런 얘기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김두규-우석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이것을 풍수적 관점에서 해석해보면, 건원릉보다 더 위쪽 산줄기에 위치해 있기에 풍수 발복을 먼저 받게 된다는 주장이다. 

세조의 장례가 끝나자 예종에게는 시급히 서둘러야 할 하나의 책무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미 왕실 내에 불길한 소문으로 떠돌고 있던 ‘장자 불길론’. 세조의 장례가 끝나자 세종의 영릉을 옮기는 일에 착수한다.


순리를 역행하면 자신이 다친다

중종의 왕비는 세 명, 원비 단경왕후 신씨는 경기 양주 온릉, 장경왕후는 고양시 서삼릉, 문정왕후는 노원구 태릉에 있고 자신은 강남 삼성동에 있어 사방에 흩어진 이산가족이다. 세 왕비는 강북에 있고, 자신은 한강 건너 혼자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제11대 중종이 승하한 당시만 해도 원당동의 서삼릉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들 왕릉이 다정하게 영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17년 후, 질투심 많은 포악한 여자가 등장했다. 문정왕후였다. 그녀는 풍수를 내세워 9대 성종이 묻힌 선릉 옆에 중종을 천장했다.

사신은 논한다. 이번 천릉한 일은 상의 뜻이 아니고 문정 왕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백성이 모두 알고 있다  
					             _명종 17년 (1562년) 8월 22일

문정왕후는 시부모 무덤 옆에다가 남편 무덤을 이장시켜서 선산을 만들고 여기에 며느리인 자신의 무덤도 쓸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명당 터라고 부득부득 우기면서 천장했던 중종왕릉은 정작 흉지 중에 흉지였다. 장마철이면 정자각까지 물이 차고 해마다 물난리로 인한 보수공사로 국고를 탕진해야 했다. 
질투 때문에 죽은 지아비를 옮긴 문정왕후 본인은 현재 중종의 곁에 묻히지도 못하고 태릉에 잠들어 있다.



독살과 예언 : 효종릉의 이장

조선 제17대 효종은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독살설에 휘말린 여러 왕들처럼 효종의 죽음도 예견치 못한 일이었다.
효종의 초장지는 동구릉의 태조 건원릉 옆자리였다. 이곳을 적극 천거한 이는 송시열이고 그는 서인이었다. 반풍수라고 공격을 받았던 고산 윤선도는 반대로 남인이다.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시절 효종 왕릉은 풍수 명당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남인, 서인 당파의 논쟁 중 승리한 서인의 전리품 전시장에 안치된 것이다. 
이 일로 파직·추고된 후, 윤선도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10년이 채 안가 (효종)능에 큰 변고가 있어 반드시 이장을 할 것이요. 나는 이 일을 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제공들은 보게 될 것이오. 그때 내 말이 생각날 것이오.”
                                                _ 답황서산도명서 [고산유고 권6, 부록] 

과연 효종 임금이 승하(1619~1659, 춘추 41세)한 후 1년이 지나자 능침에는 석물에 균열이 생기고 정자각의 석회가 떨어져 나가는 등의 변고가 생겼다.
결국 현종 14년, 우여곡절을 뒤로 하고 효종릉이 천장을 하게 되니, 윤선도의 예언이 있고나서 14년만의 일이었다. 


정조 독살설과 풍수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殯殿)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정조 즉위년 (1776년) 3월 10일 

즉위 열흘 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숭모 사업을 단행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전격적인 숙청작업을 개시했으며 영조가 생전에 직접 정해 놓았던 신후지지 서오릉 홍릉 자리를 전격 철회하고 다른 자리를 물색하게 한다. 
정조 즉위 한 달 후 영조의 능은 103년 전 효종왕릉이 있다가 석물 틈이 벌어지는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옮겨간 파묘 자리인 태조 건원릉의 서쪽으로 정해진다. 일반 민가에서도 일단 파묘된 자리에는 다시 무덤을 쓰지 않는데 천하의 영조 왕릉의 천거지가 파묘 자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과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인가? 	

역대 왕 중에 풍수에 가장 해박했던 정조는 흉지였던 사도세자의 초장지를 즉위하자 바로 천장하려고 하였고 13년을 지난 후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명당중의 명당인 수원 융건릉으로 이장하였다.
명당터 발복 탓이런가... 사도세자의 천장이 있고난 후 9개월 만인 1790년 6월에 왕자가 
탄생한다. 이가 바로 11세의 나이로 재위에 올라 34년을 다스린 순조이다.

정조 재위 24년 (1800년) 5월 30일, 정조는 급서한다. 독살설에 맞물린 다른 왕들과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결같이 반대 세력과 정치적 긴장이 극대화됐을 때 급서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조가 독살을 당했는지 어떤지를 심증은 있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판단에 중요한 역할을 할 하나의 단서가 있다. 정조가 묻힌 초장지 문제이다.	
정조의 초장지는 융릉(사도세자) 두 번째 좌청룡 발치 아래였다. 이 결정에는 영조의 계비며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데, 그녀가 정조 왕릉을 끌고 간 곳은 ‘흉지!’였다. 
한 번 파묘했던 옛 무덤 자리, 신불(神佛) 등 요사한 푸닥거리 사당터, 처형장과 감옥 등 칼과 창을 휘두르던 병영 텃 자리는 무덤 풍수상 금기시하던 것으로 산서(山書)에서도 밝히고 있을 정도로 상식에 속한다. 
정조 왕릉의 천장은 정순왕후가 죽은 후, 정조 왕릉의 흉당설이 불거져 나온 다음의 일이었다.


정조 이후...

정조 이후 조선 왕릉은 별 볼일 없어졌고 조선의 역사 또한 망실되어 갔다. 아울러 이 이후의 시기에는 풍수논란 다운 풍수 또한 없었다. 우리가 세종대의 치열한 풍수논란을 보았듯이 역사의 부침과 풍수논쟁이 그 맥을 같이 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조선 왕릉은 22대 정조 이후로는 왕릉 특유의 기풍은 사라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 대신들은 그랬다. 왕이 승하하면 택지를 하는 척 하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서 결국에는 왕릉들을 선대 왕릉의 화소 지역으로 끌고 갔었다. 왕권이 실종되자 왕릉택지도 이상해졌고, 왕릉배치와 석물들도 이상해졌다. 

순조의 초장지는 파주의 장릉(인조 왕릉) 화소 지역이었으나 후일 풍수상 문제가 거론되자 철종 7년 천장을 하였지만 그 역시 헌릉(태종 왕릉)의 화소 지역이긴 마찬가지였다. 
당당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순조의 인릉은 더부살이 왕릉으로 얹혀 있다가 흉당을 만나 또다시 태종 왕릉 한 곁에 더부살이 하고 있는 것이다. 

병권을 놓친 헌종의 경릉은 ‘왕따 당한 조선 왕릉’이다. 원래 목릉(선조릉)을 천장했던 파묘 자리인데다 이미 왕비 효현왕후의 경릉이 있던 자리였다. 이미 쓰여진 왕비릉에 왕릉이 들어가는 쌍릉은 선례가 없었다. 이는 지엄한 조선 왕릉이 안동 김씨 여식의 무덤을 따라간 것이었다. 혈 깊이도 4자 6치로 일반 무덤의 깊이. 경릉은 조선 왕릉 중 실세인 신하가 왕실을 능멸한 하극상의 왕릉이었다.


홍유릉의 슬픔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은 생전에 황제 즉위식을 가진 바 있다. 황제의 프라이드를 지키려했던 고종. 그래서 이곳 홍릉도 황제능으로 조성되었다. 참도를 비롯한 석물들도 이전의 조선 왕릉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의역군과 목수, 석수, 미장이들이 매일 일을 했고 그 역비로 매일 경성으로부터 백통전을 세 바리식 네 바리식 실어 내려왔다.
			    _매일신보, 1919년 1월 28일,  신홍릉완정, 양주군 금곡리로

생전에 정성을 다하였지만,  망국의 기운 속에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홍릉 조성사업이 사실상 중단된다.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이 승하하자 어디에 모실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비용 절감 등의 이유로 이곳 금곡, 홍릉 옆으로 결정된다.  순종의 능은 확실히 식민풍수 농간에 걸려든 흉지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사초지의 비틀리고 움푹 파인 모습이 전형적인 조선 왕릉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 두고 과혈, 즉 생기가 머물지 않고 흘러가버리는 형국이라고 한다. 

이렇게 조선의 27대 왕들이 각각의 사연을 안고 서울, 경기권 일원에 잠들어 있다.				


왕릉으로 가는 길

왕릉으로 가는 길, 
우리는 이 길에서 ‘왕의 죽음과 역사’, 왕릉을 둘러싼 ‘권력과 풍수’라는 화두를 만났다. 
조선왕릉이 거기에 그처럼 있었기에, 우리는 그 역사를 기념하고 즐기며, 더불어 자연의 공간 속에서 우리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다가가는 만큼 느낌을 주는 것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동안 우리만의 정원이었던 조선왕릉은 이제 그 이상의 가치와 생기를 가지고 우리와 함께 숨 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