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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회 SBS 스페셜

SBS 스페셜

방송일 2010.08.29 (월)
한일병탄 100년 특집 [역사전쟁] - 1부 만들어진 역사
방송날짜 : 2010년 8월 29일(일) 밤 11시 10분
연출: 서유정 / 작가 : 이용규 / 내레이션 : 배우 유오성





[기획의도]

부산에서 대마도까지의 거리 49킬로미터. 그러나 그 사이를 가로막은 불신의 거리는 쉽게 건널 수 없을 만큼 멀다. 
한국과 일본은 고대와 중세, 근현대사를 넘나드는 유구한 역사를 공유한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의 차이는 분명하다.
“한반도는 일본의 번국藩國이며 일본은 신국神國”
“일본 열도는 한반도의 우월한 문화를 수입하는 문화적 열등국”
서로 다른 역사관, 양국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이제 시대를 가로질러, 오늘날 외교적 분쟁으로까지 이어진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름 안에 숨겨진 증오와 적대감은 ‘서로’를 배제한 ‘우리’만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제 역사는 필요한대로 ‘만들어’진다. 역사(歷史)를 위한 역사(逆史), 이것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한일병탄 100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 불편한 동반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기회를 만나본다.



한일병탄 100년 특집 [역사전쟁] 1부 만들어진 역사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서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과 도쿄 한복판 메이지진구를 내려다보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 이것은 사실이다. 당신은 그렇게 믿게 될 것이다. 

동북아의 불편한 동반자 한국과 일본. 그 속에 뿌리 깊은 증오와 적개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이토록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들었을까? 


▶잘못된 역사 동일시
1592년 임진왜란 전야, 왜구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떠올리며 전의를 다진다. 그들을 그토록 들끓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조인된 1910년, 데라우치(寺內正毅) 통감은 축배를 들며 즉흥시를 읊는다. “가토(家藤淸正)와 고니시(小西行長)가 세상에 살아 있다면 오늘밤 떠오르는 저 달을 어떻게 보았을꼬.” 여기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한 심복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땅 속에서 깨워 보이리라. 고려산 높이 오르는 일본 국기를.”이라고 외치며 받는다. 
일본은 조선침략을 합리화화는 이데올로기로써 신공황후의 전설을 내세운다. 1200년 전, 신라와 백제를 복속시킨 천황의 황후. 이것이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실체이다. 신공황후로 인해 왜국은 역사적으로 삼한의 상국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다시 침략의 명분으로 자리 잡는다. 
삼한정벌과 정한론, 조선 정벌은 모두 하나의 논리로 연결된다. 그것이 바로 역사동일시, 침략의 명분을 과거에서 찾는 것이다. 


▶만들어진 역사
역사는 진실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왜곡된 역사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서기 753년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 아시아 각국의 사절들이 당 현종에게 신년하례를 위해 모여들었다. 이 하례식에서 신라와 일본이 자리다툼을 했다고 [속일본기]에 전한다. 
일본 사신 고마로는, 신라는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조공국이라며 자리를 문제 삼았다. 결국 고마로는 동쪽 맨 앞에 있던 신라사신을 끌어내리고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신라를 상대로 한 통쾌한 외교적 승리였다. 그러나 의문인 것은 이처럼 중요한 사건이 [속일본기]외에 어떤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 다른 자료에 따르면 문제의 하례식의 일본사절은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고마로가 자신의 업적을 위해 사건을 왜곡시켰다는 결론에 이른다.


▶새로운 왕조의 출현
한국에서 일본 열도로 들어가는 관문도시 후쿠오카, 그곳에서 일본 최초의 벼농사 흔적을 살필 수가 있다. 기원전 3세기, 야오이인들은 수로를 활용하는 세련된 농업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누구였을까? 당시, 수렵생활을 하던 조몬족과는 얼굴 형태부터 차이를 드러내는 야오이인들은, 발굴된 뼈의 80% 이상이 대륙사람들과 유사하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최초의 농경정착민이었던 것이다. 
일본 오사카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무덤 닌토쿠 왕릉이 있다. 야오이 시대가 물러가고 고분시대가 도래하면서 남긴 유적이다. 지배자의 권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무덤에는 또 하나의 의문이 붙는다. 
그렇다면 왜, 전에 없던 것을 일부러 만들었을까? 1948년, 에가미 나미오는 새로운 왕조의 출현이라는 학설을 제기한다. 북동아시아계 기마 부여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들어와 지배세력이 됐다는 것이다. 닌토쿠 왕릉의 주인은 이전의 왕조와는 전혀 다른 혈통의 정복왕조였다. 결국 만세일계, 순수한 혈통의 역사를 주장했던 일본의 역사는 거짓이었다. 


▶일본 문화의 뿌리
역사는 잊혀지고 왜곡될 수 있지만 옛사람들의 유물은 진실을 말한다. 
기마민족 부여는 중국을 떠나 한반도 백제에서 세력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일부 세력이 남하해 가야를 점령했고, 일본 열도 내륙 깊숙이 진출하여 지배세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무엇이 이를 증명할 것인가?
일본 고유의 것으로 알려진 창의 자루 끝에 꼽는 통형동기가 김해에서 발굴되었다.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가 깊게 연결되었음을 증명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유물로 칠지도가 있다. 백제의 세력이 강성하던 369년, 태자는 왜왕에게 칠지도를 보낸다. 일본서기는 이에 대해 백제왕이 일본천왕에게 헌상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기세가 융성했던 백제의 입장에서 왜국의 왕에게 복속을 맹세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일본 문화의 새 주역으로서 백제가 일본열도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