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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회 SBS 스페셜

SBS 스페셜

방송일 2011.02.27 (월)
3ㆍ1절 특집 SBS스페셜
역사전쟁 - 금지된 장난. 일제 낙랑군 유물조작

◈ 방송일시 : 2011년 02월 27일(일) 오후 11시
◈ 글, 연출 : 서유정





■ 기 획 의 도

역사전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상대국(경쟁국)의 역사를 비틀어 자존심에 상처를 가하고, 반대로 자국의 우월감을 높이고자 하는 역사적 만행은 문자로 역사가 기록된 이래 끊임없이 자행되어 왔다. 그리고 한 번 잘못 형성된 역사관은 쉽사리 바로잡아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 그 대표적인 것이 일제 시기 일본 관변학자들에 의해 자행된 역사왜곡이다. 단순히 사료들에서 드러난 고대사의 역사 사실을 비튼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증빙 자료가 부족한 듯하자 유적과 유물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 역사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철저하게 훼손시켰다.

 재검증의 필요성
일제 시기, 특히 이른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1867~1935년) 조사단이 활동했던 시기에 이들에 의해 알려진 낙랑군재평양설 관련 증거 유적, 유물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해방 후 지금까지 거의 이러한 것들에 대한 재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지난해 가을 영남대 정인성 교수가 논문으로 발표한 ‘대방태수 장무이묘의 재검토’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대방군의 태수 무덤으로 알려진 장무이묘가 고고학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고구려무덤이라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이처럼 재검증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있었어야 할 이러한 작업들이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 장무이묘를 포함하여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질 대표적인 것들은 이들 조사단이 활동했던 시기인 1911~1923년 사이에 이루어진 중요한 발견 네 가지다.

6번의 우연에 의한 발견 : 
세키노는 스스로 이 관련된 발견들이 모두 우연에 의한 발견임을 여러 차례 밝히고 있다. 두세 번만 우연이 겹쳐도 우연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처럼 역사상 유례가 드문, 우연에 의한 역사 유적 및 유물 발견의 의미는 무엇일까? 프로그램 말미에 하나의 반전으로 그 의미가 다가올 것이다. 

효문묘동종(孝文廟銅鐘)과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의 조작 문제 : 
그 중 중요한 하나의 예가 ‘낙랑군재평양설’즉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313년까지 북한 평양땅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이른바‘효문묘동종(孝文廟銅鐘)’과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의 존재이다. 동종의 경우 이 조그만 유물의 발견은 당시 일제사학계를 ‘진동’시켰다. 이 효문묘동종의 발견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북한 평양땅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주장은 제기되고 있었지만 이를 결정적으로 확정할만한 유적과 유물은 그렇게 많지도 않았으며 그다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기적처럼 이를 입증할 유물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이로부터 평양에서는 낙랑 열기가 고조되면서 관련 유물들의 가치가 천문학적인 액수로 치솟고, 아울러 도굴과 다름없는 유적 발굴이 횡행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 지금까지도 일제에 의해 발굴된 이 효문묘동종을 비롯한 유적`유물들은 낙랑군평양설을 입증하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 유물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유물은 진짜가 아니다. 심지어 낙랑군의 속현 중의 하나로 있었다는 점제현을 입증해준다는‘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 또한 그 의심스러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낙랑군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부족한 듯하자 역사조작을 자행한 것으로 보인다.

두 유물의 진위 여부 : 
이 프로그램은 특히 이 두 유물이 조작 또는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현대의 다양한 분석기법 및 관련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파헤칠 것이다. 프로그램에서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이들 전문가들이 가능한한 이 유물들에 대한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로 선정을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역사전문가들은 될수록 배제시켰지만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선에서 때때로 역사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 위 효문묘동종 사진들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같은 것으로,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이 첫 번째와 다른 물건으로 프로그램내에서 판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작진도 예상 못했던 놀라운 점은 이 동종의 명문이 있는 이른바 앞면의 정면 풀샷 사진과 클로즈업 사진(네번째)이 각기 다른 물건으로 분석되었다는 점이다. 만일 그렇다면 단 하나여야 할 이 동종이 3개로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점제현신사비의 경우는 오른쪽 사진 한 장의 정보를 읽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단순해 보이는 사진에는 실로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예컨대 이 사진 속에 보이는 점제비의 경우, 자연스런 모습이 아니라 글자를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탁본 종이가 붙은 상태에서 먹을 입힌 사진인 것이다. 관련 전문가들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데 제작진은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과연 이 두 장의 사진은 서로 같은 물건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두 개의 물건이 존재했던 것인가 여부이다. 관건은 이 두 장의 사진에 대한 기본 정보를 확인하면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그 조사단 : 
아울러 당시 이러한 증거물 발견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이른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1867~1935년)를 중심으로 그 조사단의 행적을 추적하여 과연 이러한 유적, 유물들의 발견 과정이 학문적 엄밀성 및 가치마저 담보하고 있는지를 따져볼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세키노는 스스로의 입으로 이러한 중요 발견들이 모두 우연이었다고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또한 대단히 비학문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대방군치지의 발견과 낙랑군치지의 발견은 그들이 지니고 다녔던 당시 육지측량부지도(陸地測量部地圖) 상에서 토성(土城)과 관련된 명칭을 발견하고, 그곳을 답사하여 이른바 한식 기와 등 관련 물품 몇 점을 수습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당토성을 대방군치지로, 대동강면 토성리 토성을 낙랑군치지로 단언을 내림)

(효문묘동종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별첨자료➀ 참고 요망)
효문묘동종(孝文廟銅鐘)에 대한 참고 사항들 : 

1. 동종에 쓰여진 명문에 의거하여, 기원전 41년, 평양땅에 효문묘가 설치되었다가 다음해 폐지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41년 무렵 중국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어지는 재난과 전국 각지에 설치된 문묘들을 운영, 유지키 위한 경비가 과다하여 이들을 폐지하기 위한 논쟁과 논의가 있어왔다. 이러한 시기에 낙랑군이라는, 저들 입장에서는 변군에 불과한 지역에 효문묘가 설치될 수가 없었으며 거기서 제기(祭器)로 사용되었다는 동종(銅鐘)도 있을 수가 없다.

2. 일제 관변학자들의 주장에 의거하더라도 효문묘동종은 단 하나여야만 하는데, 최소한 두 개 이상의 효문묘동종이 확인된다. 즉 일제는 효문묘동종을 하나만 조작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2개 이상의 유물을 조작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3. 이 동종이 우연히 발굴되어 방치되었다가 재발견된 경위 자체에 대한 설명이 의문점이 많다. 여기서 중심 증언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집에 방치된 동종을 학교에 기증한 평양중학교 4년생 橋本繁이다. 그러나 이 학생은 집에 방치된 동종을 학교선생에게 가져다 준 것뿐으로 유물 출토 경위에 대한 증언자가 될 수 없음에도 중요한 증언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유물 발굴 현장에 있었다는 그 아버지 橋本庄藏이나 다른 인물 松本正義의 증언이 없다.

4. 동종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동정(銅鼎) 1, 백동경(白銅鏡) 파편 4, 용마뉴염승전(龍馬鈕厭勝錢) 1, 계양동제품(笄樣銅製品) 1  등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동정(銅鼎)에 대한 설명이 심지어 같은 책 [八田己之助, 樂浪と傳說の平壤] 내에서도 다르게 설명되어 있다. 즉 발굴당시 가래날(또는 곡괭이)에 의해 손상을 입었다고 하였으며 2개로 나눠져 있어 橋本庄藏이 집으로 가져간 것을 닭모이통으로 썼다고 설명하는가 하면(39~40쪽), 松本正義씨의 소유로 있다가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43쪽)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리에서 출토되었다는 동정의 오른쪽 그림을 보면, 부숴진 부분이 없다. 사진이 잘못된 것이든 아니면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5.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당시에도 이미 일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효문묘동종에 대한 의문점들이 제기되고 있었다. 즉 문묘의 제기로 사용되었다는 유물이 개인 분묘의 부장품으로 매납된 것에 대한 의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이설로, 효문묘의 ‘모사품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철저하게 무시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없다.

그런데 적어도 효문제의 묘에 사용된 동종을 명기로서 분묘에 매납한 묘주는 어떤 관위에 있었던 인물인가에 대한 의문도 솟아나는데, 그와 같은 물건을 과연 부장품으로 사용했는지 여부도 큰 의혹으로, 풀리지 않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이설의 하나로 이 동종이 모처에 있었던 효문묘의 모사품으로, 그 제작된 연대는 명문에 드러난 영광 3년보다 적어도 2~3백년 후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해되고 있다. 
さて假にも孝文帝の廟に奉る銅鐘を明器として墳墓に納められた主は如何なる官位にあった人であるかとの疑問も湧き斯の如き品をはたして副葬品に使用したか否やも大きな疑惑の解けないものがあるようである. 尙異說の一つにこの銅鐘は何處かにあった孝文廟の銅鐘の寫し品で其の製作された年代は銘文の永光三年より尠くとも二三百年は後のものであらうとも解されてある.[八田己之助, 樂浪と傳說の平壤, 平壤硏究會, 昭和9년(1934년), 41쪽]

6. 이 효문묘동종의 재발견자가 바로 낙랑군재평양설을 입론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1867~1935년)였다. 그에 의한 낙랑유적에 대한 조사연구의 결과는 문헌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역사의 타율성을 선전하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는 關野貞의 한반도에서의 활동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그의 조사 활동과 연구업적 전반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연구자로서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등의 일련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세키노 타다시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확인 작업이 프로그램 후반부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