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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방송일 2008.04.13 (일)
209회- ‘거위의 꿈’

◈ 방송일자 : 2008년 4월 13일 방송
◈ 연 출 : 신상민 
◈ 글 / 구성 : 조예촌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성적표를 받는 날. 친구들은 걱정이 한 가득인데 나는 혼자 기분이 좋다.
이번에도 1등이겠지? 이날만큼은 늘 썰렁했던 내 주위에도 친구들이 몰려든다. 
“완전 신이야, 신!” 친구들이 하는 말 한마디가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한다. 
늘 그래왔듯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본다. 
언제나 당당하게, 어쩌면 당당한 척. 이게 내 신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체육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운동장으로 뛰어나간다.
나도 휠체어를 끌고 운동장으로 나가본다. 체조하는 아이들 옆을 맴돈다.
난 또 다시 혼자다. 손에 들린 성적표가 그나마 내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지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부럽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 달리기도 하고 싶고 축구도 하고 싶다. 
 나도 할 수 있다! 달리기 출발선에 선 아이들 옆에서 휠체어를 힘껏 밀고 달려본다.
하지만 금새 나를 지나쳐가는 아이들의 등을 보면 힘이 쭉 빠지고 만다. 
1등이라고 찍힌 성적표도 아까처럼 빛나 보이지 않는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좋은지...
이런 날이면 맑은 하늘을 봐도, 살랑거리는 봄바람에도 괜히 심술이 난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유동준!” 엄마의 목소리가 커진다. 조용하던 집안이 금새 소란스러워진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인 걸까...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지만 거실로 온 신경이 쏠린다.
잠시 후, 엄마가 텅 빈 초고추장 통을 손에 들고 들어온다.  
‘이번엔 저걸 다 먹었나?’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맨 입에 초고추장 한 통을 다 비우고는 씨익 웃는 저 꼬마가 내 동생 동준이다. 
 그래도 오늘 정도면 다행이다. 3년 전, 동준이가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혼자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일만 떠올리면 엄마는 가슴이 철렁하다고 한다. 거제시를 몇 번 헤맨 끝에 한 택시기사아저씨가 한 꼬마가 거제대교를 걸어가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해줘서 찾아갔더니 맨발로 거제대교를 건너고 있었다고 했다. 아주 해맑게 웃으면서! 
 동준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9년 동안 나는 동준이와 제대로 된 말을 나누어 본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홉 살이지만 하는 짓은 꼭 다섯 살짜리 꼬마 같은 내 동생.
엄마 말로는 동준이가 자폐라는 병을 앓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9년 동안이나 형이라는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어봤다는 건 너무하다. 
 동준이는 또 나와 같은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지금 내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동준이도 이렇게 될 거라고 한다. 저 녀석은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나처럼 앉아있게 되면 많이 답답할 텐데... 
 현관에 덩그러니 놓인 내 휠체어. 나에겐 없어선 안 될 물건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에겐 그저 신기한 장난감이다. 오늘도 어느새 올라타서 이것저것 누르며 놀고 있다.
내가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걸 저 녀석은 알고 있을까?

[꿈은 이루어진다]
 난 높은 곳이 좋다. 높은 곳에 올라서면 모든 게 내려다보이고 그게 전부 다 내 것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높은 곳에 올라갈 일이 없다. 내가 보는 풍경은 모두 휠체어에 앉아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가끔씩 집 앞 베란다에 나가서 바다와 멀리 보이는 송전탑을 구경하는데 그건 진작에 질려버렸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보고 싶다.
인터넷을 검색해봤더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은 한라산이라고 한다. 
 산! 그야말로 ‘꿈’이다. 여기저기에 올라와있는 한라산 사진도 별로 보고 싶지 않다.
걷지 못하는 내가 케이블카도 없는 그 산을 올라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꿈은 이루어졌다. 걷지 못하는 나를 업고라도 올라가겠다는 엄마, 아빠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홀몸으로 올라가기도 힘든 산이라는데... 날 업고 한걸음 한걸음 산을 오르는 아빠의 등이 끝없이 펼쳐진 하늘보다도 더 넓게 느껴졌다. 가끔씩 아빠의 숨이 거칠어 질 때면 엄마가 나를 업었다. 내가 미안해 할까봐 힘들다는 내색도 없이 나를 번갈아 업으며 묵묵히 산을 올라주신 엄마, 아빠. 그렇게 우리가족은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년이 되었다.

꿈꾸는 소년 동엽이와 동준이, 그리고 가족들이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동행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