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회 그것이 알고싶다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일 2006.07.08 (일)
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저 드라마의 단골 소재일 뿐인가? 한 사람 안에 여러 인격이 있는 다중인격은 그저 영화의 극적 반전을 위한 장치인 것인가? 드라마 ‘겨울연가’처럼, 영화 ‘카인의 두 얼굴’처럼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리는 사람들, 자신 안에 다른 인격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15살 호진이(가명)는 지난해 여름 갑작스런 발작과 함께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생을 형이라 부르거나 심지어는 스스로를 집에서 기르는 개로 인식했다. 정신연령은 초등학년 수준으로 퇴행했다. 호진이의 증상은 ‘해리성 기억상실’. 로버트 옥스남 박사는 아시아소사이어티 회장을 역임하고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관여한 세계적인 아시아학자이다. 그는 지난해 여름 자기가 실은 다중인격을 겪고 있다고 세상에 알렸고 미국 언론은 이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11개였던 인격이 있었는데 현재는 많이 회복되어 3개로 줄었다고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인격인 ‘보비’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기는 활달한 청년인격이고 ‘토미’는 화를 잘내는 다혈질 소년인격이라고 한다. 옥스남 박사의 다중인격 증상은 의학용어로는 정확히 ‘해리성 정체성 장애’이다. ‘해리 장애'란? ‘해리(解離)’란 분해되어 떨어진다는 의미로, 이처럼 자기 자신과 시간, 주위 환경에 대한 의식이 분리된 현상을 일컫는 정신의학 용어이다.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주요한 수단인 것이다. 해리라는 단어는 생소하지만, 실은 가벼운 해리증상은 일상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고 그것 자체는 그다지 심각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일상의 활동을 방해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면 해리장애라 할 수 있다. 해리장애에는 위의 호진이와 같이 뇌손상 없이 심리적 요인으로 생기는 ‘해리성 기억상실’, 다중인격으로 불리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 문득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다른 곳에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는 ‘해리성 둔주(遁走)’, 그리고 자주 자신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드는 ‘이인(離人)성 장애’ 등이 있다. 의사들은 특히 우리나라에선 일반인에게 증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미신이나 비과학적 치료수단에 쉽게 의존하게 되고 또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해리는 어떻게, 왜, 언제, 누구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정신적 고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앞의 호진이(가명) 경우는 학교에서의 괴롭힘과 폭력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친부의 성폭행으로 다중인격을 겪고 있는 일본의 주부나 아버지의 학대로 기억상실상태에서 상습 자살기도를 하는 여성처럼, 해리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들이 지속적이거나, 일시적이지만 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지움으로써, 혹은 다른 인격을 만들어 그 뒤에 숨어버림으로써 고통에 대처하는 것이다. 하지만 해리는 일시적인 방어기제일 뿐, 그것을 방치하거나 계속 키울 경우 개인에게는 엄청난 혼돈을 가져온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같은 개인적인 불행으로도 해리는 발생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아동학대나 성범죄, 가정폭력이나 사건, 재난과 같은 사회문제의 후유증으로 발생한다고 한다. 특히 이 부분에 우리 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미국의 경우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법적 처리나 외상치료와 함께 반드시 피해자와 그 가족의 정신과적 상처나 후유증을 체크해서 관리하도록 되어 있다. 특히 아이나 청소년의 경우 더욱 중요하게 관리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최근 뉴스를 장식한 연쇄살인사건이나 아동학대, 성폭행, 대형 참사 등의 피해자들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이번 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리장애란 무엇이고 환자들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더 나아가 가정폭력이나 학대, 재난, 사건 피해자들의 정신적 회복을 위한 사회적 배려와 시스템의 필요성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