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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회 그것이 알고싶다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일 2006.07.22 (일)
 ▶ 기획의도
  
우리나라에는 원양어업, 연근해 어업 등에 종사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당수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열악한 작업환경에서의 
많은 노동량, 그리고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인해   한국인 노동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갈등은 상습적인 
폭력으로 이어져 급기야는 극단적 살인에 이르는 비극을 낳고 있다. 


1996년 여름,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페스카마호 선상반란사건! 
사상 최악의 선상살인사건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된 지 10년이 지난   오늘날, 
그 날 이후 극악무도한 살인자의 이름으로 사형수의 삶을 살아 온 전재천은 
그 곳엔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었다고 말한다. 단지 비극의 선상폭력만이 
있을 뿐이었다고...  

  우리는  이번 방송을 통해서   페스카마호 선상반란사건은 왜 일어난 것인지,그 속에
  담긴 진실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추적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는 이러한 선상살인, 선상폭력의 원인은
  무엇인지, 제 2의   페스카마호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도끼, 칼, 상어떼가   들끓는 바다에 산채로 수장...총 11명의 죽음으로
  끝난 페스카마호 선상반란사건
  
 1996년 여름, 남태평양 해상에서 참치잡이 조업을 나간 원양어선에서 조선족 선원들이 한국인 선원 7명과 조선족 1명, 인도네시아 선원 3명 등 총 11명을 살해, 수장하여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최악의 참사가 발생했다. 바로 페스카마15호 선상반란사건! 잔인한 수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던 조선족 선원 6명은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고, 1O년이 지난 지금 페스카마호는 사상 최악의 선상반란사건이 일어난 ‘죽음의 배’로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2. 두목 전재천, 그러나 나는 두목이 아니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지난 오늘날, 페스카마호의 비극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졌지만 그 날 이후, 선상반란의 두목으로 몰려 사형수의 삶을 살아 온 전재천은 그 날의 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런 그가 10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 자신은 두목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지 거역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에 휘말렸으며, 자신 역시 그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으면 살해되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자신은 다른 공범 5명을 살리기 위해 총대를 멘 것 뿐이라는데... 진실은 무엇인가?

  

  3. 죽음의 배  페스카마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반란진압의 영웅, 유일한 한국인 생존자의 생생한 증언은?
  사형수 전재천이 수감생활을 하면서 기록해 놓았다는 페스카마호 사건일지에는 매우 상세하게 날짜별로 그 때의 상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원양어선에 올랐던 평범했던 조선족 농촌 출신 선원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는지...죽음의 배 페스카마호에서 일어났던 선상폭력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그가 말하는 페스카마호 선상반란사건에는 더 이상 일방적인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선상반란을 극적으로 진압함으로서 이 사건이 영원히 미궁으로 빠지는 것을 막았던 유일한 한국인 생존자 이모씨 , 어렵게 만난 그는 전재천이 두목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관해 새로운 증언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범 5명이 전재천에게 보낸 편지가 말해주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지...

  

  4. 중국 조선족 동포, 그들은 왜   전재천을 반란의 이 아닌 심지어 으로까지 생각하는가?
  
사실 페스카마호 선상반란사건은 무슨 사건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있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중국조선족 사회에서는 사건발생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페스카마호 사건’을 기억하며, 같은 민족끼리 일어난 비극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특히 중학교 음악 선생님으로, 인자한 세 남매의 아버지였던 전재천이 어째서 그런 반란에 연루되었고 더구나 두목으로 처벌을 받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사건 10년이 지난 올해 들어 더욱더 열심히 전재천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중국 현지취재 결과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전재천을 심지어 으로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한국을 모국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잘사는 나라 한국에 가서 돈을 벌고 꿈을 이루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보여주는 냉혹함에 크게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는 상당한 모욕감을 느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한국 사람이 일본 배에서 이런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를 외면하실 겁니까?” 

  

  5. 제 2의 페스카마호 선상반란의 비극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전보다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배 위에서는 심각한 린치가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취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고막이 찢어지고, 고환을 발로 차인후 성기능이 상실된 사건, 한국 선원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칼로 찌르고 자신은 자살한 사건... 페스카마호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의 비극 원인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비극은 반복될 수 있기에...